2017년 10월 22일 일요일

[텃밭에서 읽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2차 방정식도 배우지 못하게 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 지음, 돌베개

  “한글은 과학적 원리에 따라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원전은 안전하다. 과학적 설득이 먹혔다”. “과학이 공포를 이겼다.” 신문기사에서 삽입된 문구들이다. 과학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엿볼 수 있는 발언들이다. 과학은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척도라는 것으로 읽힌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이전의 이론들이 대체되는 것을 보면서 요즘 대중들도 과학이론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시스템은 현재에 정설로 굳어진 과학지식에 대해선 객관적이고 진리의 일부분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재판에서도 유전자 검사결과는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과연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일까?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한국인의 입장에서 서양과학사를 응시하면서 이런 의문을 풀자고 나선 책이 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 정인경은 한국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의 눈으로 과학을 바라보며 그것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책은 서양사에서 근대과학 등장의 의미와 역할, 서양인들의 근대과학에 대한 해석과 왜곡, 일제식민지 아래의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본 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국의 근대문학에서 과학에 대한 당시 우리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밝힌다. <무정>, <표본실의 청개구리>,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날개> 등 유명한 작품들을 인용하여서 흥미를 돋운다.

 

  서양인들은 뉴턴과학의 탄생으로 과학이 진리이며 인간 문명의 진보를 이루게 할 ‘인간의 이성이 곧 빛’이라고 보았다. 근대과학은 중세의 세계관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뉴턴은 만유인력과 3가지 운동법칙으로 자연세계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진리는 성경이 아니라 자연세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뉴턴이 보여주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려면 이성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양인들은 생각했다. 뉴턴은 자연현상을 해석했을뿐이지만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권력과 교회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인간을 발견했고 자신들의 또 다른 성경을 찾았다. 과학은 그들에게 진리이자 진보였다. 과학주의가 유럽인들에게 스며들었다. 과학이 세상 사람들을 계몽할 것이라는 믿음도 가졌다. 이것은 곧 식민지 국가의 전통, 역사, 문화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근대화가 곧 문명화라고 믿었다. 저자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 속에서 그 모습을 본다.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과학으로 민중을 가난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유럽사람들 중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당대에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후속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진 1940년대 이후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다윈 당시의 유럽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세상에 대한 다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윈이 주장하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나 생명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무심하고 실수투성이며 우연에 좌우될 뿐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유전적 변이와 환경이라는 우연성에 의지하는 일이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연선택에는 목적도, 방향도, 미래도 없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진화는 진보’라고 이야기하며,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진보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이론이다. 스펜서는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혼란한 것보다 질서 잡힌 것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진화로 생각한 유럽 제국주의는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진화 즉 우월한 유럽인은 열등한 인종들을 가르치고 문명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목적론적 세계관과 이데아 즉 본질을 찾는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국주의가 이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진화론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근대의 실험 대상이자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흑인종이나 황인종을 박람회의 전시물로 만들었다. 당시 조선인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 오히려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큰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다윈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너희가 그렇게 강해진 것은 우연일뿐이며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월하다고 볼 수 없으니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부당하다. 너희가 문명인이라면 당장 침략과 약탈을 멈추어라.”
 


  일제식민지 시절, 친일인사들은 일제의 과학기술이 우리의 과학 수준을 끌어올릴 것이며, 식민지 개발과 산업화가 결국 조선인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라 주장했다. 과학기술의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을 강조했다. 이는 착각이었다. 제국주의에게 과학기술은 식민지를 착취하는 도구일뿐이었다. 경성에 들어온 전등과 전차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되었으며, 함경남도 부전강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디는 전력량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전체 전기량의 네배였지만, 일본질소와 흥남 비료공장에만 공급하였다. 그 발전소를 짓기 위해 쫓겨난 농민, 건설공사 중 죽어가거나 불구가 된 조선인들은 잊혀진 채로. 화려한 전기불과 물질적 풍요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성찬이었다. 식민지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하는 자 있지만 그 당시 학교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영어도, 2차방정식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운 관문을 뚫었던 조선의 과학 인재들은 연구할 곳을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절망감과 고통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이상의 <날개>에서 묘사됨을 저자는 찾아내었다. 근대과학은 오로지 자본주의의 산업화와 세계화에 이용되었다. 식민지 개발이라고 제국주의자들은 주장하지만 그들이 식민지가 없었다면 그런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을까?


 
  과학은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지만, 민낯 그대로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당시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과학기술은 사회적 논쟁과 얽히면서 구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갈릴레오의 낙하실험, 뉴턴의 만유인력, 패러데이의 전기장, 보일의 진공실험 등은 모두 논쟁대상이었다. 지금의 과학은 그러한 논쟁들을 통과하였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었다. 뉴턴과 보일은 실험이라는 새로운 과학 연구의 방법론을 정착시켰는데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윈이 생명에는 본질적인 모습이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어쩌면 과학에도 본질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닐까? 과학은 세상과 나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과학이 감정과 가치를 동반하여 재구성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근대과학은 서양인들의 감정과 가치가 반영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과학책을 읽는 이유가 단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감정과 가치가 반영된 과학을 만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기는 공적인 과학연구는 대부분 정부의 출연금으로 지원된다. 과학은 사회의 것이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가 관심을 놓치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과학은 결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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