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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6일 금요일

[텃밭에서 읽다] 도시농부의 친구가 될 책들

도시농부의 친구가 될 책들


  곧 시작되는 농사철을 맞이해서 도시농부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 몇 권을 소개합니다. 이 책들의 선정에 특별한 기준은 없습니다. 필자가 개인적인 선호로 선택하여서 도움 받은 책들입니다. 책 소개를 보시고 직접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다른 텃밭농사 안내서들과 비교해보시고 고르셔도 좋겠습니다.
 
1. 텃밭백과 유기농 채소기르기 (박원만 저, 들녘, 2007)



  제가 텃밭농사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접한 책입니다. 우선 제 처지와 비슷했다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는 직장인으로 우연히 시작한 텃밭 가꾸기에 빠져서 주말을 고스란히 할애했다고 합니다. 많은 도시농부들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지요. 이 책의 장점은 첫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쓰레기라는 것을 모르는, 유기물이 순환하는 생태계를 본 뜬 농사법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저자는 비닐과 농약,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퇴비와 액비(액체비료) 만드는 법을 소개합니다. 둘째,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도 함부로 뽑지 말 것을 권합니다. 풀들이 작물을 압도하지 않을 정도만 관리하라고 말합니다. 작물마다 풀을 관리하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셋째, 84종이 나 되는 아주 다양한 작물들의 재배기록을 남겼습니다. 저자가 10년동안 길렀던 거의 모든 것을 담은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는 구입하려면 비싸거나 흔히 볼 수 없는 작물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다른 책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작물들이 많습니다. 신선초, 염교, 리이크, 야콘, 돼지감자, 사탕수수, 벼룩나물, 배초향, 익모초에 심지어 인삼 재배방법까지 소개했습니다.
 
 
2. 도시농부 올빼미의 텃밭 가이드 1~3권 (유다경 저, 시골생활, 2013)


  이 책의 저자는 12년동안 거의 전업이다시피 매달려서 공부하며 텃밭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 하는데요. 책은 총 3권으로 엄청난 분량을 자랑합니다. 제1권은 혼자 텃밭농사를 시작한 분들이 궁금해하지만 어디에 물어보아야할지 알 수 없었던 의문들을 해소해줍니다. 주말농장 구하는 방법, 작물 배치도 구상하는 법, 씨앗 봉투 읽는 법, 육묘하는 법, 천연농약 만드는 법 등의 정보를 실었습니다. 제2권에서는 46가지의 작물 재배법을 안내하고, 제3권에서는 요즘 각광 받는 각종 허브들의 재배법과 활용법, 갈무리 방법을 소개합니다. 상세하고 방대한 정보들로 매우 유용한 책인데요. 약간의 아쉬움이 있는데요. 비닐 멀칭과 화학비료에 대해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전업 농부가 아닌 텃밭농부들이 그런 선택을 할 필요가 있는지 저로서는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비닐과 화학비료 없이 텃밭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죠. 앞서 소개한 <텃밭백과>의 저자도 그 중 한분이고요.
 
3. 두근두근 처음 텃밭 (석동연 글그림, 위즈덤스타일, 2012)


  이 책은 제가 초보 텃밭농부인 친구들에게 선물한 책입니다. 책은 앞서 소개한 다른 책보다는 적은 분량을 가집니다. 하지만 텃밭농부들이 키울만한 작물의 재배법은 대부분 소개합니다. 목화나 수세미 같은 의외의 작물 재배법도 안내되어 있습니다. 만화가인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이 곁들여진 해설은 재배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저자 자신이 텃밭농사를 하면서 실수하거나 느꼈던 에피소드 등을 컷 만화로 그려 만화책을 보는 듯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진과 정보 제공 만화, 컷 만화 등의 시각 정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질적인 정보는 모두 제공하면서도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초보자가 보기에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올해 처음 호미를 잡은 초보 텃밭농부는 이 책으로 농사를 시작했다가 궁금한 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에는 앞선 책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4. 텃밭정원 가이드북 (오도 저, 그물코, 2013)


  농사에서 섞어짓기는 다른 종류의 작물을 나란히 함께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섞어짓기는 바로 ‘자연의 다양성’을 텃밭에 옮겨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흙도 건강해지고 작물도 병충해로부터 강해집니다. 굳이 비료와 농약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죠. 저는 이 ‘섞어짓기’를 공부하고자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섞어짓기 좋은 작물이 있고, 피해야 할 작물이 있습니다. 감자는 콩, 옥수수와 섞어짓기 하면 좋지만, 토마토 옆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각종 작물의 섞어짓기 궁합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안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텃밭정원’을 소개합니다. 채소와 꽃이 함께 어우러진 정원을 만드는 법을 보여줍니다. 먹을 수 있는 수많은 꽃들로만 이루어진 정원의 구성도도 실려 있습니다. 입 뿐만 아니라 눈도 즐거운 밭으로 안내합니다. 좀 더 생태적이고 아름다운 텃밭을 원하는 분들게 추천합니다. 하지만 작물 재배법은 비교적 간략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안내서도 함께 보실 것을 권합니다.
 
(추신) 
  어떤 책을 선택하든지 초보 농부님들이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책마다 나와 있는 재배표에 전적으로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당근과 양배추 등을 책 속 재배표 대로 파종하였으나 제대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양배추는 수확이 늦어져 장맛비에 녹아 버렸고, 당근이 자라는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느렸습니다. 다 자란 당근들도 크기가 매우 작았습니다. 그 씨앗들은 좀더 일찍 파종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씨앗 봉투에 적혀있는 재배표가 해당 씨앗에 제일 적합한 재배 시기를 알려줍니다. 안내서들에 나온 재배표는 대체적인 감각을 기르는 데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텃밭에서 읽다]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보라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책세상

  한 여자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마진주’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방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한참을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낯설지 않은 곳이다. 여기가 어느 곳인지 어리둥절해 있는 참에 문이 벌컥 열린다. ‘빨리 안 일어나’하며 소리치는 사람은 바로 8년 전 돌아가신 엄마다. 요즘 필자가 즐겨보는 드라마 ‘고백부부’의 한 장면이다. 18년차 부부인 최반도, 마진주가 이혼 도장을 찍은 후 자고 일어났더니 두 사람 모두 과거 20살 시절 돌아가서 겪는 이야기이다. 반도, 진주 두 사람은 몸은 어린 시절로 돌아갔으나 기억과 정서는 38살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으로서 먼저 살아본 경험과 이력으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필자도 대학시절로 돌아간다면 후회했던 일들을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나타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싶다. 대학 시절, 나는 평소 얼씬 거리지 않았던 종교 동아리에도 가보고,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도 수소문해 친구들과 함께 만나보기도 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한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해줄 이들을 찾은 것이다.


 
  이 책,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의 주된 관심은 요즘 젊은이들의 불만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적 도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대립한 오이디푸스의 반항하는 청춘이나 자신 속으로 빠져든 나르키소스의 자폐적인 고립을 선택한 청춘의 이미지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물리적 아버지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문화·경제 체제를 상징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심리학자”이며 심리분석가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왔다. 저자 레칼카티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사유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들’, ‘욕망과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신분석학의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읽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나 작은 인내심만 가지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였다.


  누구나에게 삶은 ‘타자’와 무관할 수 없다. ‘타자’의 인정과 평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다른 인간 ‘타자’로부터 인정을 얻지 못하면 강아지, 고양이, 화초인 비인간 ‘타자’에게서라도 인정을 받고자 한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끝도 모르는 경기침체, 빚더미와 함께 시작하는 사회생활, 비전과 직업의 부재는 청년들에게 욕망을 앗아갔다. 꿈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3년 반째 취준생인 한 청년은 사실은 취업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경제’쪽에 관심이 많지만 돈 문제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으로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비영리단체 ‘좀 놀아본 언니들’에 접수된 사연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고민을 깊이 털어놓지도 못하고 있다. 사실 청년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은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있다. “삶이 생동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전수’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유를 누리라며 부추긴다. 쾌락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만든다. 욕망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존재에 의해 ‘증언’될 때, 심리적 ‘고아’들이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텔레마코스이거나 텔레마코스가 될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인은 자신의 학생들이 텔레마코스 같다고 말한다. 강의 시간에 자신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꼰대의 권위적인 설교가 아니라 삶의 파도를 몸으로 받아낸 인생선배의 ‘증언’에 목말라 있었을 게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텔레마코스의 시선은 항상 미래를 향해 있다. 눈이 멀어 바닥에 쓰러지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눈이 있어도 자신의 이미지밖에는 바라볼 줄 모르는 나르키소스와 달리, 텔레마코스는 바다를 바라본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운다. 누구라도 텔레마코스의 바다에서 돌아올 수 있다.” 저자는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를 심리 진단의 도구이자 이 시대의 청춘 또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인문학 독서 및 강좌 열풍, 학습공동체, 도시농업공동체 등이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바다에 띄워진 배가 아닐까. 저자는 증인인 아버지는 ‘우연히’ 찾아 온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에게 그 ‘우연’이 찾아올 수 있도록 수많은 배가 띄워지길 기원한다.

2017년 10월 22일 일요일

[텃밭에서 읽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2차 방정식도 배우지 못하게 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 지음, 돌베개

  “한글은 과학적 원리에 따라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원전은 안전하다. 과학적 설득이 먹혔다”. “과학이 공포를 이겼다.” 신문기사에서 삽입된 문구들이다. 과학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엿볼 수 있는 발언들이다. 과학은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척도라는 것으로 읽힌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이전의 이론들이 대체되는 것을 보면서 요즘 대중들도 과학이론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시스템은 현재에 정설로 굳어진 과학지식에 대해선 객관적이고 진리의 일부분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재판에서도 유전자 검사결과는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과연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일까?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한국인의 입장에서 서양과학사를 응시하면서 이런 의문을 풀자고 나선 책이 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 정인경은 한국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의 눈으로 과학을 바라보며 그것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책은 서양사에서 근대과학 등장의 의미와 역할, 서양인들의 근대과학에 대한 해석과 왜곡, 일제식민지 아래의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본 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국의 근대문학에서 과학에 대한 당시 우리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밝힌다. <무정>, <표본실의 청개구리>,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날개> 등 유명한 작품들을 인용하여서 흥미를 돋운다.

 

  서양인들은 뉴턴과학의 탄생으로 과학이 진리이며 인간 문명의 진보를 이루게 할 ‘인간의 이성이 곧 빛’이라고 보았다. 근대과학은 중세의 세계관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뉴턴은 만유인력과 3가지 운동법칙으로 자연세계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진리는 성경이 아니라 자연세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뉴턴이 보여주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려면 이성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양인들은 생각했다. 뉴턴은 자연현상을 해석했을뿐이지만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권력과 교회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인간을 발견했고 자신들의 또 다른 성경을 찾았다. 과학은 그들에게 진리이자 진보였다. 과학주의가 유럽인들에게 스며들었다. 과학이 세상 사람들을 계몽할 것이라는 믿음도 가졌다. 이것은 곧 식민지 국가의 전통, 역사, 문화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근대화가 곧 문명화라고 믿었다. 저자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 속에서 그 모습을 본다.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과학으로 민중을 가난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유럽사람들 중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당대에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후속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진 1940년대 이후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다윈 당시의 유럽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세상에 대한 다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윈이 주장하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나 생명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무심하고 실수투성이며 우연에 좌우될 뿐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유전적 변이와 환경이라는 우연성에 의지하는 일이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연선택에는 목적도, 방향도, 미래도 없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진화는 진보’라고 이야기하며,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진보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이론이다. 스펜서는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혼란한 것보다 질서 잡힌 것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진화로 생각한 유럽 제국주의는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진화 즉 우월한 유럽인은 열등한 인종들을 가르치고 문명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목적론적 세계관과 이데아 즉 본질을 찾는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국주의가 이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진화론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근대의 실험 대상이자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흑인종이나 황인종을 박람회의 전시물로 만들었다. 당시 조선인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 오히려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큰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다윈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너희가 그렇게 강해진 것은 우연일뿐이며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월하다고 볼 수 없으니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부당하다. 너희가 문명인이라면 당장 침략과 약탈을 멈추어라.”
 


  일제식민지 시절, 친일인사들은 일제의 과학기술이 우리의 과학 수준을 끌어올릴 것이며, 식민지 개발과 산업화가 결국 조선인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라 주장했다. 과학기술의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을 강조했다. 이는 착각이었다. 제국주의에게 과학기술은 식민지를 착취하는 도구일뿐이었다. 경성에 들어온 전등과 전차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되었으며, 함경남도 부전강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디는 전력량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전체 전기량의 네배였지만, 일본질소와 흥남 비료공장에만 공급하였다. 그 발전소를 짓기 위해 쫓겨난 농민, 건설공사 중 죽어가거나 불구가 된 조선인들은 잊혀진 채로. 화려한 전기불과 물질적 풍요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성찬이었다. 식민지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하는 자 있지만 그 당시 학교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영어도, 2차방정식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운 관문을 뚫었던 조선의 과학 인재들은 연구할 곳을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절망감과 고통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이상의 <날개>에서 묘사됨을 저자는 찾아내었다. 근대과학은 오로지 자본주의의 산업화와 세계화에 이용되었다. 식민지 개발이라고 제국주의자들은 주장하지만 그들이 식민지가 없었다면 그런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을까?


 
  과학은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지만, 민낯 그대로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당시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과학기술은 사회적 논쟁과 얽히면서 구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갈릴레오의 낙하실험, 뉴턴의 만유인력, 패러데이의 전기장, 보일의 진공실험 등은 모두 논쟁대상이었다. 지금의 과학은 그러한 논쟁들을 통과하였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었다. 뉴턴과 보일은 실험이라는 새로운 과학 연구의 방법론을 정착시켰는데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윈이 생명에는 본질적인 모습이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어쩌면 과학에도 본질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닐까? 과학은 세상과 나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과학이 감정과 가치를 동반하여 재구성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근대과학은 서양인들의 감정과 가치가 반영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과학책을 읽는 이유가 단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감정과 가치가 반영된 과학을 만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기는 공적인 과학연구는 대부분 정부의 출연금으로 지원된다. 과학은 사회의 것이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가 관심을 놓치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과학은 결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텃밭에서 읽다] 지리산에 진짜 도시가 있다!

<시골생활: 지리산에서 이렇게 살 줄 몰랐지?> 2015, 정상순

  ‘시골생활’이란 단어를 막닥뜨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 떠올린다. 낙후된 곳, 고된 농사일, 빚더미, 단조로움, 고립, 불편함 등이다. 요약하면, ‘불편하고 힘든 생활’이리라. 하지만 이 책 ‘시골생활’은 이런 편견을 날려버리며 ‘나도 시골생활을 해볼까나’라고 꿈꿔보게 한다.



  ‘시골생활 - 지리산에서 이렇게 살 줄 몰랐지?’의 저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인 구례, 남원, 산청 등의 크고 작은 공간과 모임, 사람들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인 만든 ‘마을극단’, 경제활동과 문화적 욕구가 만나는 장터 ‘콩장’, ‘저절로 굴러가는’ 잡지 편집모임 ‘지글스’, 집 아닌 다른 공간을 제공하는 ‘토닥’, 자립과 연결의 욕구가 만든 ‘살래청춘식당 마지’, 연결의 묘미를 알게하는 카페 ‘빈둥’, 조용히 살려고 귀촌한 필자를 끌어들인 지리산 문화공간 ‘토닥’, 또래 엄마들의 협동조합 ‘자연에서’까지 이들은 대부분 작은 공간이나 한 두명에서 비롯되었다. 서로 친밀감과 아이디어를 쌓아가며 이런 저런 실험을 했다. 장터도 만들고 잡지도 만들고 강좌도 만들고 콘서트장과 놀이터도 만들었다. 그로 인해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아이디어가 모여들었다. 그들의 물리적 ‘공간’은 기억과 역사가 쌓여가며 대체할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사람이 공간을 장소로 변화시켰다. 카페 ‘토닥’은 10년 된 호프집에 자리했다. 그곳엔 집 아닌 다른 공간, 소통과 다양한 자극이 필요한 사람들의 놀이터이며 꿍꿍이의 장소다. 호프집이나 ‘토닥’이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무엇이 다를까. 호프집에 모이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일한 사람들과 주로 만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10년 내내 했을게다. 몇 년에 1번씩 보는 학교 동창들이 주로 뻔한 이야기판을 벌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토닥’을 비롯한 필자가 방문한 공간들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내면의 욕구를 끌어내는 자극에 몸을 맡기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해 보는 장이다.


  ‘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의 저자는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기준을 다양함에서 찾았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여 사는지,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지가 도시와 ‘시골’을 가르는 것이 아니다. 접근 가능한 여러 자원과 활동, 인적 네트워크가 도시 여부를 판가름한다.
한국인 10명 중 9명은 도시에 산다. 나도 그렇다. 나를 포함한 도시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매우 단순하게 보낼 것이다.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출근길에 나서고 저녁 늦게 퇴근해 술을 마시거나 집에서 텔레비전 또는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까? 가끔씩 몰링과 블록버스터 영화로 문화생활을 즐기고, 교외로 나들이 가며 괜찮은 인생이라 자위하지 않을까. 우리의 도시는 우리에게 다양한 자원과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맞는가. 제공하지만 도시살이의 버거움으로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사는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게 아닌가.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도시’ 속에서 고립되어 ‘도시’를 견뎌내고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지리산 둘레의 ‘시골살이’엔 다채로운 공간이 있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있고 다양한 실험이 있다. 삶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진짜 도시는 지리산에 있다. 살만한 도시를 만들고 싶다면 저 지리산 ‘시골살이’를 돌아볼 일이다.

2017년 8월 23일 수요일

[텃밭에서 읽다] 인간의 일상도 상품이다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민음사
 
이 책의 원제는 The Age of Access 즉, 접속의 시대이다. 노동의 종말, 부의 종말 등 비슷한 제목을 연상시켜서 홍보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국내 출판사의 의도에 의해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책은 소유의 종말에 대해 다루기 보다는 접속이 어떻게 물밀듯이 다가오는 지에 대해 말한다. 여러가지 사회 경제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접속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저자의 지적 탁월함과 통찰력을 대변해준다. 접속이라는 단어를 빼버린 제목이 유감스러운 이유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말한다. “이세상이 불편한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올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말한다. “인간의 일상도 상품화될 것이다. 시간조차도”
인간 생활 즉 문화도 모두 상품화된다. 문화는 한 사회가 공유하는 의미의 교집합이다.
예술가들은 그 문화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고 대중들과 서로 상호작용도 해왔다. 그 속에서 문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제 문화도 경제가 포섭해가고 있다. 문화적 경험과 그 경험이 존재하는 그릇인 시간이 팔리고 있다. 상업화되어가고 있다. 기업은 이제 인간생활을 모두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1쇄가 출판된 2001년 당시에는 예측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스마트폰과 네이버, 구글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SNS와 유튜브는 사람들의 시간을 마구 흡입했고 그것은 창업자들에게 엄청난 부로 돌아갔다.


 
‘접속의 시대’에는 문화라는 것이 예전처럼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레 형태가 갖춰지는 것이 아다. 거대기업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형되고 진화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 모두를 지배하게 된다(233). 말 그대로 시공간 속에 살아가려면 거대기업에게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탈이란 더 이상 자유를 의미하지 못한다. 다른 브랜드를 가진 다른 기업의 상품으로 갈아타는 것이다(251). 아이폰을 버리고 안드로이드폰을 쓰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태어나자마자 컴퓨터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며 사육당하는 인간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매트릭스의 인간들처럼 자신은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환상 속에 머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문화산업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16년 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2017년 6월 21일 수요일

[텃밭에서 읽다] 테크놀로지, 기술은 피부다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이영준x임태훈x홍성욱



스마트폰 알람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손끝으로 환한 LED등을 켜고 수돗물을 틀고 전자레인지 속 음식을 데운다.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에서 5초만에 지상으로 내려온다. 강 밑을 지나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손가락만 까닥하면 만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앞에서 일을 한다. 여가시간엔 우주 또는 넓은 바다 속, 상상의 세계를 실감나고도 스펙타클하게 보여주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영화를 본다. 다른 이는 하늘을 나는 드론을 띄우며 즐거워한다. 빠진 치아를 대신해서 인공 치아를 심고, 퇴행성 관절염으로 녹아내린 연골은 인공 관절로 대체한다. 우리는 테크놀로지 속에서 산다. 우리에게 테크놀로지는 피부다. 다치거나 기능을 잃었을 때에만 알아차릴 수 있는 몸의 일부다. 하지만 고도화되는 기술로부터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각종 기기들은 버튼으로만 우리와 접촉할 뿐이다. 그들의 작동 원리와 구조는 알지 못한다. 점점 더 의존하게 된 테크놀로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을 출발점이다.
 
책은 3명의 저자가 각각 디지털 비평, 기계 비평, 적정기술로 나누어 썼다. 디지털 비평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사유의 폭을 어떻게 좁히고 일반대중 특히 디지털 기술 종사자를 소외시키는지 보여 준다. 또한 자본과 국가가 우리의 시간과 일상을 어떻게 탐하는지 설명한다. 기계 비평은 사진작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야구장, 대형빌딩, 지하철역사, 대형 공연장 속의 기계를 세세히 살핀다. 점점 복잡한 유기체를 닮아가는 기계가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보이진 않으나 어떻게 수면 아래에서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을 직접 찍은 현장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적정기술 편은 첨단 기술이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사회·환경 여건에 따라 최적의 기술이 있는 것이지 시공간을 막론하고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진국의 적정 기술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거주지, 환경 아래에서 분투하며 현장의 기술을 만들어가는 모습도 비춘다. <텃밭에서 읽다> 지난편에서 소개했듯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가 지금처럼 자원 소비와 환경 파괴를 지속한다면 50년 내에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적정 기술은 지속가능한 기술로서 이런 위협에 대처하는 훌륭한 도구이며, 그 효과를 발휘하려면 정책, 사회제도, 기술 플랫폼의 새로운 배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현대의 디지털과 기계 기술들은 일반 대중이 마음대로 주무르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전파사가 거의 사라졌고, 현재의 자동차 정비사들은 전기 자동차 앞에서는 무력할 것이다. 고도의 전문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므로 자본과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기술은 더욱 일반 대중으로부터 분리된다. 일반 대중이 그들의 생리를 깊이 이해하거나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 변화·발전시키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오히려 그것을 아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지배당하기 십상인 영역이다. 소수 엘리트의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기술의 생리와 속성을 이해해야 함을 저자들은 살핀다. 나아가 우리는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가진 가치에 따라서 기술의 발전 방향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에 자리한 적정기술편은 사회, 정치, 문화가 기술과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운영방식을 그동안의 것과 다르게 재배치해야 함을 주장한다. 앞으로 다가오는 로봇,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자리를 잃을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정치인과 소수 전문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나서서 의논해야 할 일이다. 그러려면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기술이 우리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협의해야 한다. 따라서 무작정 기술만능 또는 기술혐오로 나아가지 말 것을 세 저자는 권한다. 기술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해 성찰할 것을 권한다. 무거운 주제인듯하지만 풍성한 예화와 새로운 개념이 책 읽는 즐거움을 준다. 의미와 즐거움에 잡학상식까지 모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 공학에 대한 비평이 없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다. 인간의 유전자지도를 완성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료 이후 생명공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줄기세포 치료, 유전자 복제·조작 등과 관련하여 풍성한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기술과 자본, 기술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좀 더 많은 질문을 남겨 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2017년 5월 22일 월요일

[텃밭에서 읽다] 50년 후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 에코페미니스트의 행복혁명> 강남순 외 지음, 시금치


  ‘문명의 붕괴’, ‘총·균·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가 지금과 같이 계속 소비한다면 지구의 광물, 생물 자원이 남아나지 않으며 기후 재앙이 50년 내에 우리를 삼킬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삶에 큰 문제가 있음을 경고한다. 


  한달에 20일 이상을 미세먼지로 숨 쉬는 것 자체가 걱정이고 방사능 공포도 한 몫 한다. 기후 변화로 큰 태풍과 가뭄이 반복되며,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는 성장을 향해 달려가라고 우리를 채찍질 할 뿐, 우리의 최소한의 안정된 삶과 안전 심지어는 생명에조차도 관심이 없다. 쉴 틈 없이 일하지만 미래는 늘 불안하고, 일상 자체가 위협으로 둘러 싸여 있다. 환경호르몬은 여성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피할 방도가 없다. 일상의 삶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학(ecology)’과 ‘페미니즘’이 결합한 단어이고,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는 사유와 실천의 집합이다. 1970년대에 모습을 갖추었으며, 이후로 계속된 논쟁과 실천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나 여전히 진화 중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 위기와 성차별 문제가 동일한 가부장제의 사회구조 아래에서 발생했다는 인식을 가진다. 위에서 말했듯 생활 자체, 삶 자체가 상존하는 위협 아래에 있으므로 이런 불안과 공포의 구조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하려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이다.


  이 책은 여성환경연대가 2014년 열었던 ‘에코페미니즘 학교’를 계기로 30~60대 여성들로, 여성단체 활동가, 농부, 연구자, 직장인 등의 다양한 출신의 15명의 글을 한데 모아 만들어졌다. 글쓴이가 다양한 만큼 글의 내용과 결은 다채롭다. 에코페미니즘의 이론과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여러 현장에서 얻은 성찰과 깊은 고민까지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세상에서 여성·자연·유색인종·동물·성소수자는 열등한 존재다. 남성·문화·백인·인간·이성애자는 우월하고 본질적인 존재다. 우월한 존재는 열등한 존재를 물건처럼 취급하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열등한 존재들은 존중받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은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만을 인정해준다. 당장 돈이 벌리는 노동만이 가치가 있다. 사실 이런 세상은 우리 눈 속의 컨택트 렌즈를 벗어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이런 세상이 ‘자연스러운’ 세상이라고 교육받으며 사회화 되었다. 그것을 알려주고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에코페미니즘이다.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했다. 잘 지내시냐는 물음에 “집에서 노는 데 별일이 뭐가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평생을 양육과 가사일을 했으며 그 덕분에 망가진 몸을 가졌음에도 가사일을 쉴 수 없는 어머니는 자신을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고 지칭한다. ‘돌봄 노동’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수많은 여성 중의 한분이다. 자연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발 대상이다. 개발되지 않은 자연은 아직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곳이다. 발전이 안된 곳이며 불편한 곳일뿐이다. 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생태학자 토니 주니퍼는 화폐가치로 답한다. 매년 인간의 활동으로 훼손되는 자연의 가치는 6조 6000억 달러라고. “자연은 보험회사, 질병 관리관, 쓰레기 재활용 시설, 수도회사, 해충 방제관, 태양에너지 전환 장치”이다.


  에코페미니즘은 ‘돌봄 노동’ 중심 사회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전업주부, 동네 청년, 노인, 자원활동가, 예술가, 자급하는 소작농들은 산업 사회에서 무능한 존재들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로 중요한 일을 한다. 양육 및 가정 살림, 이웃과의 교류, 자원 활동, 동네 텃밭 가꾸기, 아이들의 등하교길 안내, 토종 씨앗 지키기, 탈핵의 중요성 알리기, ‘희망버스’ 타고 밀양 할매들 응원하기 등등. ‘돌봄 노동’은 아이를 양육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인류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는 필수적인 노동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좋은 삶’을 위해서 “지속적인 자연 파괴와 자원 고갈을 촉진하는 소비라는 집단적 감각”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주장한 인류 멸망의 시기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면 생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노동에는 타율노동, 자활노동, 자율노동이 있다. 타율노동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임금 노동을 가리키고, 자활노동은 육아, 청소, 가사 등 생명의 성장과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노동이며, 자율노동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하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타율노동에 의해 잠식된 사람은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고, 요리, 청소, 육아 등을 타인에게 돈을 주고 맡김으로서 그들에게 ‘타율노동’을 하게 한다. “타율노동 중심의 삶은 자본에 모든 인간을 구속”시킨다. “고르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자활과 자율노동의 비율을 높이며 생태적 삶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돌봄 노동가 의미와 가치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사회가 인정하게 하고 생태적 삶 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책·문화의 전 부문을 바꾸어야 한다. 누군가는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스타리카는 1948년에 군대를 없앴고 2007년 ‘자연과의 평화’ 정책을 수립하여 지금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100%에 육박한다. 대부분의 국가가 국민총생산 즉 경제 성장에 매달릴 때 “자연과 평화를 추구”했다. 부탄 국민들은 국민총생산은 낮아도 행복지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부탄은 생태학적 다양성과 회복력 등을 포함한 국민행복지수 높이기를 국정의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의 방식으로 인류가 살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50년이 남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다며 그들은 70살이 되기 전에 큰 재앙을 맞는다. 요즘 희망적인 이야기도 들린다. 새 대통령이 부탄의 행복정책에 관심이 많다는 소식이다. 얼마든지 다른 삶, 다른 세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미세먼지, 땅 꺼짐, 각종 대형 재난사고, 여성 혐오 사건 등 일상적 위험이 수시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때 에코페미니즘은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도움 받은 자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312345125&code=210100 [문명, 그 길을 묻다 - 세계 지성과의 대화](1) ‘총균쇠’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경향신문, 2013-12-31
100% 눈앞, 한겨레, 2017-01-04
http://www.ohmynews.com/NWS_Web/Articleview/article_print.aspx?cntn_cd=A0002149590 4대강 파헤친 대가, '빚잔치'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2015-10-09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94880.html ‘부탄 예찬’ 문 대통령, 행복 정책 도입할까, 한겨레, 2017-05-15

2017년 3월 13일 월요일

[텃밭에서읽다] 돌봄과 떠나보냄을 이야기하는 '늑대아이'

파일:attachment/Wolf_Children_2.jpg

우연히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없을까 살펴보다가 구매를 한 영화 '늑대아이'
정작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재미있게 본 영화이다. 자막판을 구매해서 혼자보려고 했는데 6살 아들이 함께 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대사를 읽어주긴 했지만 영상만으로도 2시간 가까운 영화를 애들도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였다. 나중에 8살 딸도 와서 함께 후반부를 보았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인 '유키'가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중간중간 나레이션을 하며 이야기를 끌고간다. 주인공의 엄마는 대학교에서 우연히 만남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게 되는데 '늑대인간'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무섭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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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함께 살게된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둘째가 태어난 후 주인공 아빠인 '늑대인간'은 주인공 말에 의하면 부양에 대한 책임감에서 사냥본능이 살아났는지 어느날 밤 늑대로 변한체로 사체로 발견된다. 화가나거나 뛰어다닐때 자신도 모르게 늑대로 변하는 아이들 때문에 인간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워하던 엄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아이들을 키우려고 인적이 거의없는 시골 집으로 이사를 가게된다.

늑대아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엄마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살것인지 찾아가길 바란다. 인간으로 살 것인지? 늑대로 살 것인지? 그리고 텃밭을 만들어 농사도 시작한다. 큰 숲이 있는 마을에서 들짐승의 피해로 농사가 어렵다는 마을주민말도 있었지만, 책으로 배우는 농사가 쉽지 않아 실패를 거듭한다. 이와중에 마을의 무뚝뚝한 노인의 도움으로 감자농사를 성공하고 도움받은 사람들에게 감자를 나누면서 마을사람들과 조금씩 관계를 맺어가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 학교에 가게되고 활발하고 밝은 주인공은 학교생활에 재미를 느끼면서 점점 인간사회에 적응해 간다. 반면,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소심했던 둘째 아이는 학교에 흥미를 못 느끼고 숲에가서 있길 좋아한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과정이 있으면서 둘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엄마는 주인공인 첫째 아이를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로 보내게 되고, 둘째 아이는 숲으로 (늑대로 살아가게) 보내게 된다.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나에게 이 영화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영화였다. 언제 늑대로 변할지 모르는 아이들로 인해 도시에서 삶을 포기하고 시골로 이사를 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해진 길대로 잘 따라가길 바라는 것일까? 

시골생활에 들어가면서 농사를 짓는 장면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집앞에 넓은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먹고 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리고 잘자라던 작물이 갑자기 죽어가게 된다. 몇번의 시도에도 키우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농사관련 책으로 공부를 해도 쉽지 않다. 이때 마을 노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참견하여 농사를 알려주기 시작한다. 결국 처음으로 수확에 성공한다.

인간은 아무리 잘난 개인이라도 사회적이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어찌보면 사회적인 관계속에서 개인의 나약함을 보완하고 살아가고, 그 사회적관계망이 복잡다양해지면서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 인간은 경험을 나누면서 시행착오를 줄여갈 수 있다. 노인의 농사경험은 단순히 책에 나오는 지식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농사와 다르게 주인공의 엄마가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늑대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혹은 '늑대인간'인 죽은 남편은 어떻게 키워져서 살아왔는지이다. 우연히 만난 우리에 갇힌 늑대에게 묻기도하고 죽은 남편에게 묻기도 하지만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

어쨌든 농사지으면서 맺은 마을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되고, 어느새 사람들을 피해서 이사온 마을에서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몰려있던 도시에서 고립되고 외롭게 살았었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했던 시골에서는 오히려 눈에 잘 띄면서 자연스레 관계가 형성되면서 살아가게 된다.

마을에서는 숲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주인공은 벌이가 필요해 여기에서 아르바이트식으로 일을 하게된다. 둘째아이는 숲에 가길 좋아하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자주 학교를 빠지면서 엄마와 숲으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숲에서 늑대선생님을 만나게된다. 숲에서 늑대의 역할을 배우고, 어떻게 숲에서 살아가는지 배우게 된다.


키우는 것 만큼이나 보내는 것의 중요함

큰 비가 오고난 후 숲에서 늑대(선생님)가 크게 다치면서 둘째아이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선생님의 역할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며 엄마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직 11살 밖에 안된 아이가 어리다고 생각한 엄마는 아이가 떠날까봐 두려워하는데, 또다시 큰 비가 내리는 어느날 사라진 아이를 찾으러 숲을 헤매며 다닌다. 헤매다가 쓰러진 엄마를 아이가 숲 밖으로 내려주고 다시 아이는 숲으로 떠난다.

첫째아이는 멀리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기 위해 기숙사로 들어가게 된다. 늑대로 살아갈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려서 활발하고 늑대로 변해 사냥도 잘하던 첫째는 학교에 가면서 인간사회에 적응하게 된다. 반대로 약하고 조용하던 둘째는 숲에서 늑대로의 삶을 배우며 결국 집을 떠나 숲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얼마 전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직도 집에서는 찰싹같이 달라붙어 아빠만 불러대는 아이가 큰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기 시작했다. 입학식(에는 간단한 식과 인사만 하고 끝난다.) 다음날 진짜로 학교를 가던날 손을 잡고 10분넘는 거리를 함께 걸어갔다. 종알종알 이런저런 얘기를 막 쏟아내다가 교문앞에서 혼자가야한다고 말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잘도 간다. 그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품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닌데 그날의 내 감정은 이제 조금씩 아이를 놓아주어야할 때가 오고있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엄마를 구해놓고 숲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늑대아이의 한장면과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집을 떠나는 날도 올 것이다. 키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것 만큼 보내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나는 부모곁을 어떻게 떠나왔는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늑대아이/yuki2.jpg


2017년 1월 26일 목요일

[텃밭에서읽다] 입춘, 우리의 설날

안철환(온순환협동조합 이사장)
 
이 글은 안철환선생님이 텃밭보급소에 절기에 대해 연재했던 2008년 글 중을 다시 퍼온 것입니다. 지금은 원문을 찾기 어려워 출처를 이렇게만 밝혀둡니다.
입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입춘이 되었지만 아직 날은 겨울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곧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나 농부는 입춘 날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흙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봄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봄은 흙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흙을 시멘트로 덮은 위에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봄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봄은 어떻게 올까요? 봄은 바로 냉이 뿌리를 타고 올라옵니다. 겨울 추위를 받아 웅크리고 있는 입춘의 냉이를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놈을 꼬챙이로 살 파보면 초라한 이파리와 다르게 길죽하게 잘 빠졌으면서 토실토실하게 살찐 냉이 뿌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걸 보고는 한 숨에 “이~야!!!” 감탄사가 절로 나지요. 대충 흙을 털어내고 입에 넣어보면 입안에 봄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농부는 봄을 느낄 수 있답니다.

냉이 뿌리에는 단백질이 많이 담겨있답니다. 물론 비타민도 많지요. 겨울 잠에서 깨어난 곰이 제일 먼저 먹는 것이 바로 냉이랍니다. 입춘이라고는 하나 아직 추운 겨울인지라 먹을 게 냉이 말고는 없지요.

우리의 음력 설날은 입춘 근방에 있습니다. 입춘에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의 글자를 써서 대문에 붙이는 것을 보면 입춘도 음력 설날에 버금가는 설날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정월 1월은 우수(雨水)에 듭니다. 24절기는 입춘부터 시작하는데, 첫 시작 절기를 절, 그 다음 오는 절기를 중이라 하고 순서대로 절, 중, 절, 중으로 이어갑니다. 그러니까 입춘은 절, 우수는 중, 경칩은 절, 춘분은 중이 됩니다. 중이 들어가는 절기를 기준으로 음력 달도 정해지지요. 우수가 1월, 춘분이 2월, 곡우가 3월, 소만이 4월, 하지는 5월, 대서는 6월, 처서는 7월, 춘분은 8월, 상강은 9월, 소설은 10월, 동지는 11월, 대한이 12월 그러니까 섣달이 됩니다.

왜 우수를 정월로 삼고 입춘을 설날로 삼았을까요? 사실 제일 한 해의 기점이 되는 것은 동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 했습니다. 12지지(地支)로 볼 때는 자월(子月), 첫 시작 달로 삼았지요. 이는 양력입니다. 태양이 기준이니까요. 그럼 음력설은 동지를 지나 처음으로 오는 그믐날로 삼는 게 상식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음력설은 그보다 한 달이 넘게 더 지나서 옵니다. 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구는 동지 근방에 와서 공전 속도가 빨라집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으로 도는 지구는 동지 때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지와 대한 사이가 제일 짧아 어떨 때는 한 달 안에 동지와 대한이 함께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동지 다음에 오는 중, 곧 대한을 동지 다음 달로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대한 다음인 우수를 정월달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동지가 있는 음력 11월 하순경에 대한이 낄 경우 12월을 없애고 바로 1월로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동지에는 윤달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복잡해 이해가 잘 가질 않지요. 복잡한 계산은 뒤로 하고, 사실 입춘을 설날 기준으로 삼은 것은 농경 사회의 반영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설날은 농사를 시작하는 날이지요. 농사를 시작한다고 하면 파종을 떠올리겠지만 우리는 파종보다는 거름 준비, 종자 손질을 농사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본격적인 파종은 춘분을 기점으로 합니다. 그래서 춘분을 설날 기준으로 삼은 사회도 있습니다. 유대인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렇지요. 여하튼......

입춘이 되면 집안의 어른은 한 해 길흉을 보았습니다. 먼저 입춘이 음력 설날보다 빨리 오면 그해 봄은 춥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런 해를 보았더니 다 맞았습니다. 작년 2007년도 설날이 입춘을 한참 지난 2월 18일날이었는데 봄이 춥고 꽃샘추위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입춘 일진을 봅니다. 60갑자로 입춘날이 어떤 일진인가 보는 것이죠. 올해 입춘 날은 갑술(甲戌)입니다. 입춘 일진에 갑, 을이 들면 대개 풍년 들고, 병, 정이면 큰 가뭄이 들고 무, 기 이면 밭 곡식이 손상되고, 경, 신이면 사람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임, 계이면 큰 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자세하게 60갑자에 맞춰 각각 일진에 해당하는 그 해 길흉을 점쳤습니다.

길흉을 따져보는 다른 방법으로 보리 뿌리 살려보는 게 있습니다. 보리 뿌리가 세가닥이면 풍년, 두 가닥이면 평년 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보았습니다. 뿌리가 많으면 튼튼하다는 뜻이니 당연히 수량도 많겠지요. 뿌리가 적다는 것은 겨울 날씨가 순조롭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그해 날씨도 순조롭지 못하다고 예측한 것이겠지요.

입춘에 선 봄은 그야말로 살짝 맛보기만 보여주고 이내 꽃샘추위가 몰아닥칩니다. 아직 추위가 남았다 해서 여한(餘寒)이라 하는데 어떨 때는 소한, 대한 추위보다 더 할 때가 있습니다. 작년 2007년이 그랬지요. 꽃샘추위는 꽃피는 봄을 시샘하는 추위라는 말이지만 농사에서는 아주 요긴한 추위입니다. 입춘 지나 우수, 경칩이 되어 벌레가 봄이 온 줄 알고 알에서 깨어났는데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추위에 얼어 죽고 맙니다. 말하자면 생태청소꾼인 셈입니다. 이런 꽃샘추위가 없다면 그해 농사에 병해충이 많이 발생합니다. 가을 벌초할 때 가끔 발생하는 말벌 떼의 습격이 잦으면 겨울도 따뜻하고 꽃샘추위도 별 볼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입춘에 제일 중요한 농사일은 거름 뒤집기, 종자 손질하기, 보리, 밀 밟기입니다. 거름은 가을에 만들어 놓은 것을 한 번 뒤집어 주든가, 겨우내 모아 둔 똥오줌과 아궁이 재, 낙엽이나 마른 풀, 왕겨나 볏짚 등과 켜켜이 쌓아 새로 거름 더미를 만들어 둡니다. 겨우내 처마 밑에 걸어두었던 이삭을 꺼내 씨앗을 걸러내고 체와 키로 까불리고는 계란이 뜰 정도의 소금물에 담가 가라앉는 놈들을 선별해서 종자로 씁니다.

보리밟기를 하는 이유는 겨우내 흙이 얼었다 녹았다 하느라 서릿발이 서서 흙이 떠버려 뿌리가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밀도 마찬가지고, 양파나 마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로 살짝 밟아주면 됩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를 보면 입춘 날씨에 따라 그해 농사 길흉을 점친 내용이 나옵니다. “입춘에 비가 내리면 오곡에 해를 끼치고, 입춘일이 청명하고 구름이 적으면 그 해에는 곡식이 잘 익으나, 입춘일이 흐리고 음습하면 그해는 벌레들이 벼와 콩을 해친다.”
입춘은 따뜻한 봄을 알리는 날이니 봄 같지 않게 비가 온다거나 음습하다면 농사에도 좋을 게 없겠지요.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텃밭에서읽다] 도시농부들의 지역사회 나눔과 공헌

도시농업지원법이 만들어지고 정부나 지자체서 다양한 지원을 통해 도시농부들을 많이 만들고 도시농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개개인이 텃밭농사를 통해 각자 먹을거리를 기르고 즐거움을 찾는 활동인데 세금을 들여 이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도시농업을 이렇게 법으로 만들어 지원하는데 공익적인 다양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도시농업정책은 특정한 개인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공익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농업법에도 목적이 ‘자연친화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과 ‘도시와 농촌이 함께’ 발전하시는데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특정한 개인에게 수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랜동안 도시농업은 오해를 받고 있다. 상자텃밭을 나누어주고, 텃밭분양을 해서 누군가에게 싸게 혹은 무료로 공급을 해주고, 텃밭교육을 해주면서 수혜자가 생긴다. 도시농업 참여자는 수혜를 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이마저도 시간이 안되거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여의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일종의 중산층 이상에게만 수혜가 돌아가는 정책이라는 인식이 높다.

[표] 서울시도시농업참여자 실태조사, 2013

그래서 도시농부들(도시농업참여자들)도 사회에 대한 공헌을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몇몇 공동체텃밭에서 나눔장터를 통해 수익금을 지역에 환원하기도 하고 수확된 채소를 일부 나눔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는 도시농부들의 사회공헌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더불어 함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시작은 이렇게 되었다. 회원들 중 자녀들도 텃밭에 참여시키면서 단체활동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자원봉사활동고 연계가 되면 더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를 반영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청소년자원봉사단 ‘흙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이다.


올해 초 회원들에게 그리고 지역의 학교에 알려 자원봉사프로그램을 홍보하고 60여명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참여했고, 학교선생님, 부모들도 일부 참여했다. 봉사단의 운영은 텃밭강사들이 맡아주기로 했다. 텃밭교육을 오랫동안 해보았던 경험을 통해 아이들과 친숙하게 어울리면서 텃밭교육을 가미한 텃밭봉사프로그램을 일년으로 기획하여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수확한 채소들은 지역의 푸드뱅크와 연계하여 소외계층에게 전달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김장채소들을 수확해 함께 김장을 준비해서 담그고 이 또한 지역사회 기부활동으로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몇가지 측면에서 그동안 도시농업사업과 차이가 있다. 첫째는 참여자들이 수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공헌을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텃밭강사들은 아이들에게 텃밭교육과 함께 자원봉사단을 꾸려서 운영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있고, 청소년들은 여러가지 자원봉사활동과 달리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실질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게다가 텃밭농사경험을 통해 교육적인 효과도 만들어진다. 둘째는 도시농부들의 사회공헌을 체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지역사회 다양한 기관들이 함께 협업하여 만들어지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사례를 만들었다.


이는 이후에도 학교(교육청), 도시농업단체(텃밭강사), 자원봉사센터, 사회복지기관 등이 함께 협업하여 도시농업의 사회공헌활동을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농사를 짓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내가 먹고 남을 만큼 수확된 채소들은 이웃들과 나누게 되고, 한번 나눔을 경험한 사람들은 나눔했을 때의 뿌듯함을 알기에 이웃과 함께했을 때 의미를 알게된다. 그동안 도시농부들도 이런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이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사회공헌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 더 많은 도시농부들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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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김충기대표가 모두농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텃밭에서 읽다] 온전한 나의 시간과 만나자

온전한 나의 시간과 만나자

<실행이 답이다> 이민규 저, 더난출판사

저자 이민규는 “실행은 답이다.”라고 말한다. 실행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일까? ‘생각을 성과로 이끄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책 중간에 자주 언급되는 ‘기업’, ‘비즈니스’라는 단어는 ‘실행’을 통해 얻는 ‘성과’를 자연스럽게 ‘성공’으로 치환하게 한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행복 인생과 성공 비즈니스를 꿈꾸는 당신을 위한 실천 지렛대”라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서문 말미에서 저자는 “실행은 자기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며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음을 알려준다. 필자는 ‘통제감’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감’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 바로 ‘실행’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을 나의 것으로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실행’이라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모래성 쌓기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그 순간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다. 근사한 모래성이라는 ‘성과’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파도가 쳐서 모래성을 무너뜨리면 기뻐한다. 한 번 더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을 누릴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출처 : 픽사베이


아침 출근길, 전철역 바로 앞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파란 불로 바뀌자 형광색 조끼에 노란색 모자를 쓴 할아버지, 할머님들이 노란 깃발을 펼치며 사람들의 길을 열어준다. 몇몇 사람들은 횡단보도선과 깃발의 범위를 넘어서 옆으로 빠져 걸으려 한다. 그때 건너편의 할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젓고 호루라기를 분다. 몇몇은 횡단보도선을 벗어나 대각선으로 걸으려다 다시 곧게 걷는다. 그런 광경을 보며 “참~ 융통성이 없는 분들이시네. 고리타분해. 어차피 길건너서 오른쪽 길로 가야하는데, 선 좀 벗어난다고 저 야단이셔.”라고 내뱉는다.
 
“내일 꼭 나와야 해! 부장님이 강조하셨다.”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행사 참석을 위해 출근하라는 상사의 지시다. 이런 경우가 일상화되어 있지만, 아직도 마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내 시간, 내 삶이 통제당해야 하다니. 어쩌다 쓰는 휴가는 또 어떠한가. 급한 업무가 없어도 눈치를 보아가며 휴가 결재를 받아야 한다.
 
위의 2가지 예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삶에 대한 통제감에 관한 이야기다. 어르신들에게 건널목의 선을 벗어나는 사람들은 당신들의 일에 훼방을 놓는 이들이다. 그 순간에 대한 통제감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고 간단한 일이지만 자신이 좌지우지 하는 일이 아니라면 재미있을 리 없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주도적으로 처리할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보다는 상사가 시킨 잡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급이 높은 상사일수록 지시한 일의 경중을 떠나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 그 순간 나는 일의 완급과 경중을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이다. 때때로 좌절감이나 낭패감을 맛보는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나의 시간, 나의 삶이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느껴질 때이다. 성공과 성과로 가는 사다리로서의 ‘실행’ 보다는 ‘통제감 높이기’의 디딤돌로서의 ‘실행’을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실행’은 자신의 순간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고삐이다.

“모든 변화는 저절로 움직이는 자가추진력을 갖고 있어 아주 작은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킨다.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121쪽)”
 
‘최소한의 일’이란 바로 당장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실행’이 또아리를 튼 최소단위의 통제가능한 영역은 스스로를 확장시켜서 큰 변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변화에 실패하는 사람일수록 편지나 이메일의 회신이 늦고, 쉽고 즐거운 일만 하려한다는 대목은 무릎을 치게 한다. 바로 필자의 행태 그대로이다. 실행력이 탁월한 지인은 이 책을 읽었으나 흥미롭게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 실행을 잘하는 사람은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무엇이든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반가운 책이다. 그런데 반갑기만 하고 거기서 멈출 가능성도 크다. 실행을 미루고 미루다 목표마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목차는 그대로 행동지침으로 써도 좋을 만큼 간결하고 명확하고, 문체는 평이해서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본문에 풍부한 상담사례와 자기동기화 3단계, ‘파생효과 노트’ 작성의 세 가지 효과 등등, 요점을 정리한 부분과 Stop&Think&Action과 같이 실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 여러분에게 권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비슷한 내용을 여기저기에 배치해 놓아 중복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대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목표’만 있을 뿐 ‘지금’은 없다. 지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실행’과 관련된 내용은 ‘통제감’에 대한 내용정도다. 성공과 성과는 개인의 ‘실행’에만 달려있다고 강조하는 시각도 아쉬운 점이다.


 
 

2016년 6월 12일 일요일

[텃밭에서 읽다] ‘뉴 빅브라더’를 아시나요.

[텃밭에서 읽다] ‘뉴 빅브라더’를 아시나요?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 2014, 구본권, 도서출판 어크로스
 
얼마전 필자에게 생긴 스마트폰은 신기한 물건이었다. 스마트폰 메신저에는 지인들이 올린 사진, 동영상에 심지어 설문조사도 있었다. 아무데서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버스 도착 시간도 알려주었다. 이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스마트폰 좀 장만하라고 필자를 다그쳤나보다. 감탄 뒤엔 부작용도 있었다. 사무실이든 어디든 스마트폰 메신저의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고, 울리지도 않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메신저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한다. 작은 화분 속의 꽃이 말라 죽을까 염려하듯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었다.
 
2007년 아이폰이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10년 만에 스마트폰은 사람들의 주의를 온통 빼앗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3시간 39분 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사용자의 35%는 손에 늘 들고 다닌다.(동아일보 2014.12.17. “하루 3시간39분, 스마트폰 끼고산다”) 통계를 모르더라도 지하철만 타보면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훔쳤는지 말이다. 손바닥만한 작은 기계는 이제 인간세상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흔히 기술 자체는 선악의 성격을 띄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에게 좌우될 뿐이라고들 말한다. 긴 막대기가 토마토 지주대가 될 것인지, 사람을 공격하는 봉이 될 것이지는 그것을 손에 넣은 사람의 뜻에 따라 달라진다. 막대기에겐 어떤 의도나 목적도 없다. 디지털 기술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연결하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스마트폰은 편리한 소통수단이 되거나 스마트폰 중독의 원흉이 될 수도 있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은 사람에게 달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의 저자는 이런 통념에 반대한다. 기술은 편향적이라고 주장한다. 총이 아무리 선하게 쓰여도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다. 어뢰, 독가스, 미사일은 발명되고 나서 전쟁을 끝장낼 ‘평화의 도구’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현실은 정반대였음을 책은 말한다. 인터넷도 “정치적 토론과 소통을 활성화시키며 직접민주주의의 도구”가 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여론조작과 바람몰이가 그 기대를 뒤덮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더더욱 중립적 도구가 아님을 강조한다.

(출처: 픽사베이)

“디지털 기술은 객체가 아니라 목적을 띤 시스템이다. 그것은 목적을 품고 행동한다.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211쪽)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디지털 기술은 혁신의 속도가 빠르다. 점점 복잡해지지만 사람들에겐 더더욱 단순한 모습으로 다가간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직관적이지만 그 기술은 점점더 복잡해진다. 소프트웨어로 동작하기 때문에 복잡성과 속성을 사람들을 잘 모른다. “일상생활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지만 알지 못한다. 그 기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작동하는지 말이다. 우리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를 노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일상을 셀카와 함께 끊임없이 공개하고, 위치정보도 노출시킨다.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스스로를 감시와 통제에” 맡긴다. 디지털 기술의 속성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이 책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은 3가지의 큰 속성을 가진다. 첫째는 망각을 어렵게 만든다. 인터넷에 퍼진 자료는 지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쉽게 퍼나를 수 있고, 오래되었다고 낡지도 않는다. 2014년 유럽 최고법원은 특정인의 요구대로 구글은 검색 결과에서 오래전의 신문기사를 삭제하라고 판결했다. 세계 곳곳에서 ‘잊혀질 권리’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둘째, 모든 것을 연결하려 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항상 누군가와 연결하게 만든다. 얼마전 한국에서 프랑스와 미국으로 각각 입양되었던 쌍둥이 자매가 성인이 되어 만나 화제가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다가 SNS를 통해 알게 되어 연락을 시작하고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사물들도 연결된다. 냉장고와 텔레비전, 공장의 기계들끼리도 연결하여 정보를 주고 받는다. 셋째, 모든 것을 공개하고 공유하려 한다. 페이스북 개발자 마크 주커버그는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이야기할 정도다. 이 세가지 속성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편리함을 선사하였으나 ‘뉴 빅브라더’도 함께 다가오게 만들었다. 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여기저기에 남겨야 한다. 그 덕분에 누군가의 실수나 욕심으로 내 주민등록번호는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디지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노출하고 동시에 그만큼 타인의 일상과 내밀한 영역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출처: 픽사베이)

필자는 꿋꿋하게 일반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요즘에서야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일반 휴대폰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비싼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있어도 디지털 텔레비전을 장만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쓰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쳐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날이 머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는 매트릭스가 우리의 일상을 포위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며 순응하며 사는 게 유일한 해답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2012년께부터 미국 젊은이들은 ‘폰 스택’ 게임을 한다. 식사 자리에서 가장 먼저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게임이다. 스마트폰을 보는 관점의 변화라고 책의 저자는 말한다. 또 다른 예로는 실리콘 밸리의 어느 학교를 들고 있다. 대부분 유명한 정보기술 기업에 다니는 학부모를 둔 이 학교에는 컴퓨터는 물론 빔 프로젝터조차 없다. 수업료가 연간 수천만원에 달하는 이 학교에는 분필과 칠판, 책 등 아날로그 기자재만 있을 뿐이다. 컴퓨터가 창의적 사고, 인간 교류, 주의력을 훼손하기 때문이란다. 저런 예는 특별한 경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리라. 이를 대비한 저자는 책 말미에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술을 지혜롭게 쓰기 위해 알아야할 지침 10가지를 소개했다. 첫 번째 지침은 “기기가 당신을 조종하지 못하게 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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