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그마한 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우리 집 앞에는 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봄과 여름,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고 황금빛 벼들이 고개를 숙이던 가을, 논바닥이 휑하니 드러난 겨울. 논은 한해의 시작과 끝을 느끼는 또 하나의 달력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나에게 논은 지나가는 풍경정도였다. 벼가 어떻게 크는지 옆에서 보기는 했지만 직접 벼농사를 경험해본적은 없었다. 이렇게 시골집 앞에 있는 논에서도 해보지 못했던 것을 도시 한복판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올해 4월 토종벼를 지키고 키우는 농장에서 토종볍씨 다섯 종류를 받아왔다. 청주시 용정동에서 자란 용정찰, 검은 돼지를 연상시키는 흑저도, 임금이 대궐에서 먹었다는 대골도, 현미가 자색을 띤다는 자광도, 까락만 검은색인 흑갱. 이외에도 우리나라에 150여가지의 토종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벼는 딱 한 가지 이름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각각의 특징에 맞는 이름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니 굉장히 놀라웠다. 받아온 볍씨를 물에 넣고 싹을 틔운 뒤 모판에 볍씨를 뿌렸다.
옥상 비닐하우스에 꽃샘추위를 피하며 자란 모들은 5월 말 부평 갈산공원 안 논에 심겨졌다. 어린아이부터 학생, 청년, 어르신까지 함께 모여 손모내기를 했다. 벼농사는 사람이 아닌 마을이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줄을 길게 잡고 일렬로 쭉 늘어서서 함께 합을 맞추며 모내기를 하니 끝날 때 즈음에는 얼굴을 몰랐던 옆 사람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조그마한 아이가 진흙 범벅이가 된 모습을 보며 함께 웃고, 어른들도 아무렇지 않게 맨발로 논둑을 걸어 다닌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함께 심은 벼는 9월 말에서 10월 즈음 함께 수확한다. 토종벼는 일반 벼보다 키가 무척 크고 수염처럼 보이는 까락이 있다. 다섯 종류의 벼가 심긴 논은 황금색이 아닌 다양한 빛깔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크기의 낫을 들고 조금은 어색하게 낫질을 시작한다. 낫질이 서툴러서 벼를 베지 못하고 톱질하듯 뜯으면서도 낫질을 멈추지 않는다. 공원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을 건다. 어린집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르신들은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추수 때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분은 새참을 먹으면서 하라고 과일을 나눠주고 가고, 어떤 분은 쉬면서 하라고 음료수를 주신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나눔이 오고간다.
벼를 베고 나서 발탈곡기를 이용해 이삭에서 낟알을 분리해낸다. 발을 계속 위아래로 움직여야 통이 돌아가고, 통에 붙어있는 뾰족한 모양의 쇠에 벼를 이리저리 가져다 대면 낟알이 분리되어 날아간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쌀알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이는 볏짚들과 쌀알들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가득 찬 느낌이 든다. 옛날 농부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확을 했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탈곡을 하고, 옆에서는 짚으로 새끼를 꼰다. 토종벼는 길이가 긴 만큼 새끼 꼬기에 안성맞춤이다. 새끼 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 옆에 아이도 맘처럼 잘 안되는지 낑낑대며 엄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조상들에게도, 도시농부들에게도 벼는 버릴 것이 하나 없다. 낟알은 도정하여 밥으로 먹고 남은 것들은 새끼를 꼬아 짚풀 공예를 하거나 밭 표면에 가득 덮어준다. 밭 옆에 작더라도 논이 함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 종류 벼 중 자광도는 아직 여물지 않아 몇 주 지나서 벼를 벴다. 때마침 인천 미추홀구 도시농업박람회에 부스운영에 참여하게 되어 토종벼 탈곡체험을 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농기구인 홀태를 가지고 탈곡을 해보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리로 와서 설명을 듣는다. 이 벼는 우리나라에서 자란 토종벼고, 이름도 따로 있다고 설명한다. 벼를 아이들 키와 비교하면서 친구들보다 훨씬 크다고 보여주니 놀라는 눈치다. 홀태에 벼를 넣고 힘을 주어 앞으로 당긴다. 낟알이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진 낟알에 껍질을 벗겨 우리가 먹는 쌀인지 확인해본다. 맛이 궁금한지 바로 먹어보는 아이들도 있다. 체험 후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한다. 친구들과 쌀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하고 점심식사 때 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먹자고 약속한다. 모두 우렁차게 그렇게 하겠다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어르신들도 다가와 예전에 많이 해봤다며 옆에 와서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다. 어르신마다 비법(?)들이 각기 다르다. 옛날 생각이 잠기시는지 오래도록 서서 탈곡을 하신다. 어머님들은 짚이 정말 좋다며 청국장이나 메주를 띄울 때 사용하고 싶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그 자리에서 빠르게 새끼를 꼬아 가져가시는 분도 있다. 아버님들은 홀태를 보시고 어렸을 때는 발탈곡기를 많이 썼다며 그게 더 좋다고 하신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지역 곳곳에 손모내기, 벼 베기, 탈곡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들이 있다. 어떤 농장은 소정의 돈을 내면 1년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과 토종볍씨를 제공해주는 곳도 있다. 종자를 조금 구할 수 있다면 스티로폼이나 고무대야에 흙과 물을 채워 벼를 심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논이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쌀은 마트에서, 나무에서 자란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 도시에서 벼를 함께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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