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4일 월요일

[텃밭에서 읽다] 우리의 느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텃밭에서 읽다] 우리의 느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뇌
- 안토니오 다마지오 지음 |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스피노자의 뇌>는 정서와 느낌의 본질을 추적하며 마음의 실체에 다가간다. 의사인 저자는 신경생물학의 연구성과에 근거하여 감정(정서와 느낌을 포괄하는 개념)과 마음을 탐구한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말한다. 감정과 마음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모두 만족하는 삶, 더 나은 삶에 접근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정서’와 ‘느낌’을 우선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서(emotion)는 어떤 자극에 대한 생명의 움직임이나 반응을 가리키고, 느낌(feeling)은 생명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를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느낌은 정서 즉 신체의 반응을 지각한다. 생명체는 모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최선으로 만들기 위한 자동 조절장치를 가지고 있다.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경향을 ‘항상성’이라고 말하고, 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조절장치를 ‘항상성 기구’라고 한다. 이것은 나무처럼 뿌리 쪽에는 대사활동, 면역반응 등이 있고, 그 위로 고통·쾌락반응, 충동, 정서, 느낌이 존재한다. 대사활동에서 정서까지는 몸의 활동이며, 느낌은 마음의 활동이다. 정서는 신체를 무대로, 느낌은 마음을 무대로 펼쳐진다. 저자는 “몸과 마음은 동일한 실체의, 평행선을 달리는 두가지 다른 속성이다.”라고 말한다. 생명의 진화의 역사에서 볼 때, 정서가 먼저 발생했고 느낌은 나중에 생겨났다고 한다. 정서 위의 느낌, 몸의 변화인 정서를 지각하는 ‘느낌’은 왜 발달했을까? 저자는 복잡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논리와 추론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려면 이성적 추론에 느낌이 추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층적인 생태계와 몸속 구조에 대한 이해, 복잡한 기상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우리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논리와 추론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느낌은 정서에 의해 촉발된다. 정서는 오래된 인간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사자와 뱀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정서가 대표적이다. 최근 인간사회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복잡해졌다. 10년 후의 세상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예전의 맹수 앞에서 생겨나는 느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서를 촉발하는 요소는 생명체 외부의 실체 또는 기억이다. 인공지능이 삶을 지배하는 세상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실체이다. 최대한의 실마리를 긁어모아 이성적 추론으로 예측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 필요에 의해 항상성 기구는 사회적 조절장치로서 나타난다. 사회제도, 법제도, 윤리와 이데올로기가 그것들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말하는 가상의 체계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불안정하다.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다. <사피엔스>에 따르면 ‘가상의’ 사회적 조절장치는 인간 개개인의 항상성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의 항상성을 위해 작동했다. 여기에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변화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한다.


경제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적 정서가 생겨난다. 우리 사회의 항상성을 위협하는 자극들이 일반 대중에게 부정적 느낌을 가져온다. 좋은 사회는 긍정적 느낌이 더 많은 사회일 것이다. 사회적 항상성 조절 장치 즉 국가와 사회는 저런 위기들을 오히려 왜곡하거나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위기의 이유를 왜곡하여 시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사익을 위해 사회적 조절장치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스피노자는 느낌이 더 나은 삶으로 다가가게 한다고 말했다. 만족스러운 삶으로 ‘구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느낌조차 개인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나쁜 뉴스’를 내보내며 우리의 느낌을 왜곡하는 언론이 여론 형성을 주도한다. 몇몇 특권층이 사회적 조절장치를 장악한다. 우리의 느낌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느낌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리곤 예민한 우리의 느낌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삶, 더 나은 삶을 향한 한발자국을 뗄 수 있기 때문이다.